발해의 수도 이전,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의 위대한 여정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나라, 발해. 그들은 고구려 멸망 후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만주와 연해주에 걸친 드넓은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3대 문왕 시기에 이루어진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의 수도 이전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의 변화를 넘어, 발해의 국가 체제와 정치적 위상이 크게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위대한 여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발해의 중심, 동모산의 의미
발해의 첫 번째 수도는 길림성 돈화시 부근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이었습니다.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운 곳이자, 발해의 건국 이념이 태동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동모산은 지리적으로 주변이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어에 유리했으며, 초기 국가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최적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은 발해 건국 초기의 역동성과 자주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발해가 점차 영토를 확장하고 대내외적으로 성장하면서 동모산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험준한 지형은 교통과 물류를 어렵게 만들었고, 대규모의 인구를 수용하고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해는 새로운 수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문왕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발해가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며 점차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건국 초기의 산성 도읍지로는 더 이상 제국의 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문왕의 결단, 중경 현덕부와 상경 용천부
3대 문왕(재위 737~793)은 발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고 문화와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문왕은 발해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수도 이전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때 한 번에 상경 용천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거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742년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천도한 것은 발해의 중심지를 내륙으로 이동시켜 영토 확장과 행정 효율을 꾀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중경 현덕부는 비록 잠시 머문 수도였지만, 이곳에서 발해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율령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 운영 시스템을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문왕의 더 큰 비전은 중경 현덕부를 넘어 더욱 넓고 효율적인 곳에 자리 잡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755년경, 그는 발해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수도가 될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수도를 이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발해는 '해동성국'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이는 문왕의 확고한 통치 의지와 비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상경 용천부, 발해의 찬란한 영광
상경 용천부는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면모를 자랑했습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떠서 건설된 이 도시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궁궐, 관청, 민가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궁궐터는 왕과 귀족의 권위를 드러냈고,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구조는 수도의 방어와 행정 기능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궁성터, 내성터, 외성터가 모두 발굴되어 당시 도시의 웅장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상경 용천부의 천도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정치적으로 발해는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둘째, 경제적으로는 주변 지역과의 교역을 활성화시키고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데 유리했습니다. 셋째, 문화적으로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발해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이자 당당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상경 용천부는 단순한 수도가 아니라, 발해의 융성과 위용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 발해의 찬란한 문화와 제도가 집약되어 있었다.
발해가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긴 후, 고구려의 부흥을 넘어 독자적인 제국으로 성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멸망하는 순간까지 발해의 수도 역할을 했던 상경 용천부는 발해의 번영을 상징하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발해는 멸망 이후에도 고려와의 교류를 통해 그 유산이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중요한 역사의 한 축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 발해 수도 이전이 남긴 역사적 유산
발해의 수도 이전은 단순한 행정적 절차를 넘어, 한 나라의 정체성과 비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건국 초기 방어에 치중했던 동모산에서 대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 상경 용천부로의 천도는 발해가 점차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해동성국'의 위상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는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하되, 시대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를 발전시킨 발해의 역동성을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상경 용천부의 유적을 통해 발해의 찬란했던 역사를 마주하고, 그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연도 (서기) |
사건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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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년 | 발해 건국 |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발해를 세움 |
719년 | 대조영 사망 | 무왕 대무예가 즉위하여 영토 확장 |
742년 | 중경 현덕부로 천도 | 문왕 시기, 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로 수도를 옮김 |
755년경 | 상경 용천부로 천도 | 문왕이 발해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인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김 |
793년 | 문왕 사망 |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왕이 사망하고, 발해는 혼란기를 맞음 |
926년 | 발해 멸망 |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 멸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