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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해상 항로 개척과 일본 무역의 발전, 숨겨진 해양 강국의 진면목

발해의 해상 항로 개척과 일본 무역의 발전, 숨겨진 해양 강국의 진면목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 우리는 흔히 발해를 육지 중심의 강국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발해는 광활한 영토를 기반으로 한 해양 강국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발해가 개척한 해상 항로는 단순히 무역의 길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발해의 위상을 드높이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발해는 과연 어떤 해상 항로를 개척하여 일본과의 교역을 활발히 전개했을까요? 그리고 그 무역이 발해에 가져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글을 통해 발해의 역동적인 해상 활동과 해양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해 봅니다.

발해의 해상 항로 개척과 일본 무역의 발전, 숨겨진 해양 강국의 진면목

 

발해의 동해 항로: 일본으로 가는 뱃길을 열다

발해는 멸망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그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해상 활동은 동아시아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발해가 일본과 교역하기 위해 이용한 주요 항로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됩니다. 하나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출발하여 솔빈부를 거쳐 동해로 나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발해의 남경남해부에서 출발하여 동해를 따라 남하하는 길입니다. 이 중에서도 솔빈부를 통한 항로는 발해가 동해 북부와 사할린 해역을 아우르는 해상 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 신라를 모두 '해동의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발해의 교역은 주로 사신 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발해는 정기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며 정치적, 경제적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해 사신들은 고구려 유민들의 숙련된 항해 기술을 활용하여 험난한 동해와 사할린 해역을 능숙하게 항해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해상 기술의 우수성을 넘어, 발해가 북방 민족의 역동성과 해양 민족의 기술력을 모두 갖춘 복합적인 국가였음을 시사합니다.

발해는 단순히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 나라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일본과의 교역 품목과 그 경제적 의미

발해와 일본의 무역은 주로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수출한 주요 품목은 담비 가죽, 호피(호랑이 가죽), 꿀, 인삼, 웅피(곰 가죽) 등 풍부한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특산물이었습니다. 특히, 담비 가죽은 당시 귀족 사회에서 매우 귀하게 여겨지는 최고급 모피로,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단, 견포, 나전칠기 등 세련된 수공예품과 철기류가 발해로 수출되었습니다. 또한, 양국은 문화적으로도 활발하게 교류하며 불교 경전, 서적 등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러한 무역은 발해의 경제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특산물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여 발해의 기술력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교역을 통해 확보한 물자들은 발해 귀족들의 사치를 충족시키는 한편, 주변 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궁극적으로는 발해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무역은 단순한 물자의 교환을 넘어, 국력을 상징하는 척도이자 국제 관계를 조율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발해의 외교적 성과와 전략적 의미

발해와 일본의 무역은 단순한 경제적 교류를 넘어, 발해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발해, 신라, 일본이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는 복잡한 관계였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적 전략을 펼쳤습니다. 발해 사신은 일본에 파견되어 발해의 선진 문물을 자랑하고, 발해의 국력을 과시하며 외교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일본 역시 당나라의 지나친 영향력을 견제하고, 발해로부터 선진 문물과 희귀한 특산물을 얻기 위해 발해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제휴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로서 동아시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독립적인 주체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해상 항로는 단순히 상품을 운송하는 길을 넘어, 발해의 외교적 주권을 확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발해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발해는 바다를 통해 이웃 나라와 교류하며 고구려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의 해양 강국으로 우뚝 섰다.

 

결론: 발해, 해양 강국으로서의 재평가

발해는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대륙 국가였지만, 동시에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개척한 해상 항로는 발해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고,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발해의 해상 활동은 단순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북방의 기상과 해양의 기술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문명을 창조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발해를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발해는 신라와의 대립, 당나라와의 경쟁 속에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바다를 통해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처럼 발해의 역동적인 해상 활동과 해양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고대 한국사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더 넓은 시야로 역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발해와 일본 교류 연표

시기 주요 사건
727년 발해, 일본에 첫 사신 파견.
728년 일본, 발해에 답례 사신 파견.
735년 발해 사신, 일본에 도착. 이후 정기적인 교류 시작.
8세기 중엽 발해와 일본의 무역, 가장 활발한 시기.
926년 발해 멸망. 일본과의 교류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