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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유훈인가? 후대의 덧칠인가? 훈요십조 후손 논란 파헤치기

 

왕건의 유훈인가? 후대의 덧칠인가? 훈요십조 후손 논란 파헤치기

고려를 건국하고 혼란했던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태조 왕건. 그의 위대한 업적만큼이나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훈요십조’입니다. 이 열 가지 조항은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유훈으로, 고려 왕조의 통치 이념이자 지침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훈요십조 중 일부가 후대에 조작되었거나 첨삭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훈요십조는 왕건의 순수한 유훈일까요, 아니면 후손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덧붙여진 위작일까요? 이 글에서는 훈요십조의 내용과 함께, 왜 후대 조작설이 제기되었는지 그 근거를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왕건의 유훈인가 후대의 덧칠인가 훈요십조 후손 논란 파헤치기

 

훈요십조, 태조 왕건의 유훈

훈요십조는 943년 왕건이 사망하기 직전 신하들에게 남긴 열 가지 유훈을 말합니다. 이 내용은 『고려사』에 실려 전해지는데,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 500년의 정신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불교를 숭상하며, 신하들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등 왕건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 유훈은 단순히 통치 원리를 넘어, 고려 시대 내내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왕위 계승이나 정치적 갈등 시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국가의 근본을 불교에 두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풍요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의 유훈은 단순한 충고가 아닌, 고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간이었다.

 

훈요십조는 제1조 ‘불교 숭상’부터 제10조 ‘경전 공부’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유교, 풍수지리 등 당시의 다양한 사상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제2조는 ‘사찰 함부로 짓지 말라’는 내용으로 불교의 지나친 확장을 경계했고, 제4조는 ‘거란을 경계하라’는 내용으로 외교 관계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이처럼 훈요십조는 당면한 정치적,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왕건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손 논란의 핵심, 제4조 ‘거란족 경계’

훈요십조에 대한 논란은 여러 조항에서 제기되지만, 가장 핵심적인 조항은 제4조입니다. “거란은 짐승의 나라와 같으니, 그들의 옷과 풍속을 본받지 말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조항은 당시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내용이 과연 왕건이 직접 언급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왕건은 통일 과정에서 거란과 큰 충돌이 없었고, 오히려 외교적 관계를 모색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고려의 왕들은 이 조항을 명분으로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때로는 전쟁을 불사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훈요십조 제4조는 단순히 거란을 멀리하라는 내용이 아니다. 이는 후대 왕들이 거란과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훈요십조가 처음 기록된 시기를 주목합니다. 훈요십조는 왕건 사후 한참 뒤인 현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던 때와 맞물립니다. 따라서 현종이나 그 이후의 왕들이 거란과의 전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혹은 민족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훈요십조에 거란 관련 내용을 덧붙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권위를 빌려 현재의 정치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일반적인 역사 조작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논쟁, 제8조와 제10조

후대 조작설은 제4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훈요십조 제8조는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반역의 땅이니, 그곳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이 조항은 고려가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남방 지역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태조 왕건은 통일 후 후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배타적 내용이 과연 왕건의 진정한 의지였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오히려 후백제 유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겪은 후대 왕들이 그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조항을 추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원대한 포용 정책과 상충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는 후대 왕들의 불안감과 권력 유지 욕구가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또한 제10조의 “경전 공부”에 대한 조항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왕건이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숭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 경전을 강조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후대 유교가 발전하면서 첨가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는 고려 중기 이후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유교가 점차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훈요십조 논란의 의미와 시사점

훈요십조의 후대 조작설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것을 넘어, 과거 기록이 어떻게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재해석되고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훈요십조의 일부가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역사적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특정 시대의 필요에 따라 가공되었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훈요십조는 왕건의 유훈이라는 권위 아래 고려 왕조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역사의 기록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시기 주요 역사적 사건 훈요십조와의 연관성
918년 태조 왕건 고려 건국 훈요십조의 내용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
943년 태조 왕건 사망 훈요십조가 처음 유훈으로 남겨진 시기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성종 시기) 훈요십조 제4조의 거란 경계 내용이 정치적으로 강조되기 시작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현종 시기) 훈요십조가 문서화되고, 거란에 대한 적대감 고취에 활용
1170년 무신정변 발생 훈요십조의 '문신 우대' 조항이 재해석되거나 무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