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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과 대광현 귀부 사건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과 대광현 귀부 사건

우리 역사에서 멸망한 국가의 왕족과 백성들이 새로운 나라로 귀부하는 사건은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단순한 망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10세기 중반, 발해의 멸망과 함께 고려로 귀부한 발해 왕족 대광현의 이야기가 바로 그러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왕자의 망명이 아니라,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정통성을 강화하고 북방 민족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발해의 멸망 이후 남겨진 유민들의 삶과 그들을 포용한 고려의 정책을 통해, 고려가 어떻게 진정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려 했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과 대광현 귀부 사건

 

발해의 멸망과 유민들의 운명

926년, 발해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건국 229년 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광활한 영토와 높은 문화를 자랑하던 발해는 갑작스러운 멸망으로 인해 수많은 유민들을 남겼습니다. 발해 유민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일부는 요나라에 강제로 이주되거나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발해인들이 거란의 지배에 순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발해 부흥 운동을 펼치며 옛 나라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들은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고, 각지로 흩어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고려의 존재는 그들에게 희망의 빛과 같았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명확히 했던 고려는 발해와 뿌리가 같은 민족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발해 유민들에게 고려는 단순히 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의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발해는 비록 멸망하였으나 그 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염원은 발해 유민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타올랐다.

 

대광현의 귀부와 고려 태조 왕건의 포용 정책

발해 멸망 직후, 발해 왕자 대광현(大光顯)은 약 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부하였습니다. 이는 발해 부흥 운동의 실패 이후, 거란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발해 유민들의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러한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왕건은 그들을 '고구려의 오랜 백성'이라 칭하며 환영하였고,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과 '대광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종실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단순한 망명객에 대한 환대가 아닌, 발해의 정통성을 고려가 잇는다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은 고려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려 조정은 이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토지를 지급하여 안정적인 삶을 보장했습니다. 이는 발해 유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그들을 고려 사회의 일원으로 흡수하여 국가의 인적 자원을 확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포용 정책은 고려가 단순한 후삼국 통일 국가를 넘어, 고구려와 발해를 아우르는 진정한 민족 통일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발해 왕자 대광현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을 내렸다. 이는 고려가 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함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 정치적 정당성 확보

정치적 정당성 확보의 중요성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은 단순한 명분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기존 신라 세력과 호족들의 반발에 직면해 있었으며, 이러한 내부적 불안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해야 했습니다. 발해를 계승한다는 명분은 고려가 단순한 신라의 후예가 아니라,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진정한 통일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한 방어 명분을 확보하고, 민족적 통합을 꾀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고려의 북진 정책과 연관성

고려 태조 왕건은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이 정책의 목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거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고 발해 계승 의식을 천명함으로써, 고려의 북진 정책은 더욱 큰 정당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발해 유민들은 고려의 북진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고, 이는 고려가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발해의 문화를 흡수하여 고려의 문화적 기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북진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족의 통합을 이끌어내려는 실질적인 정치적 계산이었다.

 

결론: 대광현 귀부 사건의 역사적 의미

대광현의 귀부 사건은 단순한 망명 사건을 넘어, 고려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이 사건은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를 아우르는 진정한 민족 통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함으로써 고려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확대하고, 국가 통합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셋째, 고려의 북진 정책에 명분을 부여하고, 북방 지역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대광현 귀부 사건은 고려 초기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으며, 우리 민족의 분열과 재통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건입니다. 고려의 포용 정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민족의 통합을 위해 과거의 아픔을 보듬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려는 고려의 노력이, 우리 역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광현 귀부 사건 및 관련 역사적 사건 일지

연도 사건 설명
926년 발해 멸망 거란의 침공으로 발해가 멸망합니다.
934년 대광현의 고려 귀부 발해 왕자 대광현이 10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합니다.
934년 태조 왕건의 환대 왕건이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을 하사하고 종실에 편입시킵니다.
10세기 중반 고려의 북진 정책 본격화 발해 유민을 흡수한 고려가 북방 영토 확장을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