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입과 현종의 나주 몽진 고려를 지킨 숨 막히는 여정
11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라, 즉 거란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압박해 왔습니다. 그들의 압박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고려의 존립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은 고려 왕실과 백성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어린 왕이었던 현종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하는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른바 현종의 나주 몽진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고려가 위기를 극복하고 자주성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현종의 나주 몽진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그 여정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과 개경 함락
1010년, 고려의 실권자였던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이를 고려의 정변으로 규정하고,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 아래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란의 2차 침입입니다.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을 위협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강조가 이끄는 군대가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강조마저 사로잡히면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졌습니다. 거란군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고, 결국 개경성까지 함락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고려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고려의 군대는 용맹했으나, 거란의 기세는 폭풍과 같았다. 수도가 함락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고려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현종의 피난, 나주까지의 고난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고려의 신하들은 현종에게 수도를 떠나 피난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신하들이 현종의 피난을 반대했으나, 거란군이 개경 코앞까지 진격하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어린 현종은 급작스럽게 수도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피난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거란의 추격군을 피해 밤낮으로 이동해야 했으며, 민심이 흉흉해진 지방에서는 백성들의 냉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현종을 죽이려 했던 반란 세력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현종 일행은 나주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나주는 개경과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에 위치하여 거란군의 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고려의 해상 세력이 거점을 두고 있어 유사시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긴 여정 끝에 나주에 도착한 현종은 나주성 밖의 절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현종은 지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왕실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의 피난길은 겉으로 드러난 왕권의 위기였지만, 동시에 고려라는 국가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현종은 나주에 머무는 동안 지방 세력과 소통하며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왕의 피난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이는 왕과 백성이 하나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운 순간에도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강감찬의 외교적 성과와 거란군의 철수
현종의 나주 몽진이 진행되는 동안, 고려는 거란에 대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이미 그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던 고려는 다시 한번 외교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군신들은 거란의 성종에게 국왕 현종의 항복을 알리는 표문을 보냈습니다. 현종은 자신을 '요나라의 신하'로 칭하며 거란의 침략 명분이었던 강조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양보는 거란의 자존심을 만족시켰고,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명분을 잃게 했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 뒤에는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여러 신하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거란군의 철군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한 명인 강감찬의 지략이 빛났습니다. 강감찬은 개경이 함락되기 전부터 현종에게 피난을 간언하며 거란의 목적이 단순히 개경 함락이 아니라 현종의 신병 확보에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현종의 피난은 강감찬의 판단대로 거란의 목표를 좌절시켰고, 결과적으로 외교적 협상을 통해 거란군이 철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감찬의 지략은 전쟁터뿐만 아니라 외교의 전장에서 더욱 빛났다. 그의 혜안은 고려를 구원하는 지혜가 되었다.
현종 몽진의 역사적 의의
현종의 나주 몽진은 단순한 피난이 아닌, 고려의 자주성과 왕실의 권위를 재확인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첫째, 몽진은 고려의 왕이 비록 수도를 버렸을지언정, 결코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종은 나주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지방 호족들과 소통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는 왕실의 권위가 수도 개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려 전역에 미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둘째, 현종의 몽진은 고려가 군사적 패배 속에서도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강감찬을 비롯한 고려의 외교관들은 거란의 침략 명분을 무력화시켰고, 이는 훗날 고려가 거란을 상대로 외교적 우위를 점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이 사건은 이후 고려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고 천리장성을 쌓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종은 이 경험을 통해 국방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훗날 거란의 3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현종의 나주 몽진은 고려가 외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고려는 이 시련을 통해 더욱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으며, 이는 훗날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가 당당한 한 축을 담당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연대별 주요 사건
| 연도 | 주요 사건 |
|---|---|
| 1010년 | 목종 폐위, 현종 즉위 및 거란의 2차 침입 시작 |
| 1011년 1월 | 거란군이 개경을 포위,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힘 |
| 1011년 2월 | 현종이 개경을 떠나 나주로 피난 시작 |
| 1011년 3월 |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하고 현종을 추격 |
| 1011년 4월 | 현종이 나주에 도착, 거란에 표문을 보내 항복의 뜻을 밝힘 |
| 1011년 5월 | 거란군이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철수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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