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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의 동학 창시(1860년대) – 1894년 농민봉기 이전, 민중 신앙의 씨앗 📍 동학의 탄생최제우의 동학 창시(1860년대) – 1894년 농민봉기 이전, 민중 신앙의 씨앗동학(東學)을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이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을 떠올립니다. 전봉준, 고부 민란, 황토현 전투, 그리고 갑오개혁이라는 역사의 굵직한 줄기들 속에서, 동학은 '반봉건·반외세 민중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 시발점, 1860년대 최제우의 창도 활동은 상대적으로 잘 조명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사실 동학은 단지 정치 운동의 도구가 아닌, 하늘을 섬기며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종교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당대 민중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던졌고, 기존의 질서에 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최제우는 누구였나?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주 지역의 몰..
홍경래의 난 –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 ⚔ “변방의 분노가 조선을 흔들다”홍경래의 난 –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역사는 언제나 중심의 이야기로 기록되기 쉽습니다. 조선사 역시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사, 왕권의 변화, 개혁과 개악의 흐름이 주로 조명됩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진짜 열기는 변방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1811년, 조선 북서부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변방의 분노’가 폭발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전국적인 역사 교과서에서는 비교적 작게 다뤄지지만, 이 반란은 조선 후기 사회 구조의 모순을 폭로한 거대한 균열이었습니다.📍배경 – 서북인의 차별과 세도 정치의 폐단조선은 전통적으로 지역에 따른 신분과 인식의 차별이 존재하던 사회였습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은 외세 침입이 잦고, 이민족과 가까운 국경이라는..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 📍 조선과 청, 국경을 긋다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대한민국의 동북쪽 경계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민감한 외교 사안입니다. 독도 문제, 간도 영유권, 두만강 경계선 논의 등은 모두 ‘국경’이라는 개념과 직결되죠.이런 현대적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입니다.표면적으로는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였지만, 그 결정의 기준과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란을 남기고 있습니다.🗺 배경: ‘압록강 너머, 저 산은 누구 땅인가?’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백두산 일대의 경계가 모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간도 지역(..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 예(禮)를 둘러싼 조선 정국의 분열 📍 조선 왕실의 상복에서 터진 정치 대립기해예송과 갑인예송 – 예(禮)를 둘러싼 조선 정국의 분열조선 후기, 유교적 예법은 단지 의례적 의미를 넘어서 정치의 중심축이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장례나 제례에서 ‘예(禮)’는 곧 정치적 입장과 권력의 정당성을 상징하기도 했죠.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입니다.표면적으로는 왕실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정치 대립, 왕권과 신권의 충돌, 나아가 사림 정치의 심화된 분열이 숨어 있습니다.⚖ 예송(禮訟)이란 무엇인가?‘예송’은 문자 그대로 예(禮, 유교적 예법)에 관한 논쟁을 의미합니다. 주로 국왕이나 왕실 인물의 장례에 따른 복상 기간(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 – 외교와 통상을 동시에 엮은 실용적 선택 📍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공식 무역 조약계해약조(癸亥約條, 1443) – 외교와 통상을 동시에 엮은 실용적 선택우리는 흔히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왜구(倭寇)와의 갈등 중심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충돌만이 아닌, 실용적 외교와 통상 협정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계해약조(癸亥約條)입니다.이 조약은 조선과 일본 간의 첫 공식 무역 협정이자, 이후 조선의 왜관 설치와 대일 외교 체계의 기틀이 되었던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 배경과 결과, 그리고 오늘날의 시사점까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배경: 계속된 왜구의 침략, 그 끝없는 골칫거리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까지, 조선은 일본에서 오는 해적, 즉 왜구의 약탈로 끊임없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문소(吏文所)의 부패 – 조선 왕권강화의 이면 📍 조선 초기, 권력의 그늘이문소(吏文所)의 부패 – 조선 왕권강화의 이면조선은 고려의 멸망을 반면교사 삼아,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문물과 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여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개혁과 권력 집중 과정에서 새로운 억압의 구조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문소(吏文所)입니다.이문소는 조선 초기에 설치된 실무 기구였지만, 곧 왕의 권한을 비공식적으로 집행하는 은밀한 통치 수단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 기관은 권력이 중앙에 집중될수록 커졌고, 시간이 흐르며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의 온상으로 변질되면서 백성들과 관리 모두에게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
고려의 마지막 저항, 삼별초의 대몽항쟁(1270~1273) ⚔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고려의 마지막 저항, 삼별초의 대몽항쟁(1270~127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패자의 이야기에서 더 큰 울림을 느낍니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고려가 몽골(원)과의 강화 협정을 맺고 항복한 이후,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던 무장 집단이 있었습니다.그 이름은 바로 삼별초(三別抄).지금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이 보여준 저항은 우리 역사에서 자주성과 독립 의지의 상징으로 남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삼별초란 무엇인가?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 권력을 장악한 최우가 조직한 특수 군대입니다. 본래는 궁궐을 지키고,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며, 반란이나 외적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쌍성총관부 설치(1258) – 우리가 몰랐던 북방의 상실 📍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의 비극쌍성총관부 설치(1258) – 우리가 몰랐던 북방의 상실우리는 흔히 고려가 몽골(원)과의 오랜 전쟁 끝에 굴복하여 원 간섭기에 들어갔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결정적 사건이 존재합니다. 바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설치입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 변화가 아니라, 고려의 자주성과 영토 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순간이자, 고려 역사 속 가장 뼈아픈 상실의 하나였습니다.🗺 배경: 고려와 몽골의 끝없는 충돌13세기 초반,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를 휩쓸며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1231년, 그 거대한 제국은 고려에도 침략의 손길을 뻗쳤고, 이후 약 40여 년간 여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