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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대화재 – 고구려를 흔들다 📍 국내성 대화재 – 고구려를 흔들다역사는 언제나 전쟁과 왕조 교체처럼 극적인 장면에 주목하지만, 때로는 단 하나의 사건(예를 들어 불길 속에서 타오른 수도의 참화)가 문명의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국내성 대화재(國內城 大火災)는 정확한 연대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여운은 고구려 건축 양식과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을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국내성 – 고구려의 심장고구려는 초기에 졸본에서 시작해, 2대 유리왕 때 수도를 국내성(현재의 중국 지안 지역)으로 옮깁니다.국내성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의 경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압록강 유역에 위치하여 교통과 방어에 모두 유리한 지형을 지녔습니다.고구려의 중앙 집권 체제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렸으며, 왕궁·관청·사원·민가 등..
을불 사건 – 고국천왕 시기, 계급을 뛰어넘은 왕의 탄생 📍 을불 사건 – 고국천왕 시기, 계급을 뛰어넘은 왕의 탄생한국 고대사에서 왕위 계승은 대부분 혈통, 정통성, 귀족 세력의 지지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어느 한 시기,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15대 고국원왕의 조부이자, 13대 왕 미천왕(美川王)으로 알려진 을불(乙弗)입니다. 본래 왕족의 후손이었으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며 몰락해 노비 신세까지 전락한 이 인물은 훗날 고구려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그의 등장은 단지 한 사람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계급과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왕이 된 사례라는 점에서, 고대 국가체제에서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을불이 어떻게 몰락했고, 다시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이 사건이 고구..
고구려 유리왕의 수도 이전과 왕족 내 갈등 (졸본 → 국내성) 📍 고구려 유리왕의 수도 이전과 왕족 내 갈등 (졸본 → 국내성)역사는 종종 찬란한 업적 뒤에 가려진 갈등과 분열의 그림자를 잊곤 합니다.고구려 건국 초기, 2대 왕인 유리왕(瑠璃王)은 위태로운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도를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는 대규모 결정을 내렸습니다.그는 명분상 더 넓은 평야, 방어에 유리한 지형, 농업 기반 확장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상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왕권과 혈통, 충성, 정통성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수도 이전 결정 속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특히 주몽의 아들들과 유리왕 간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 싸움이 아니었으며, 고구려 초창기 왕위 계승과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였습니다.🏔 졸본 – 고구려의 시작이자 주몽의 기억기..
서울의 봄과 김상진 열사의 투신 사건(1980) 📍 서울의 봄과 김상진 열사의 투신 사건(1980)1980년 5월 18일 이전에도, 한국 사회는 이미 거대한 격랑 속에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솟구친 시기. 이를 우리는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자유에 대한 희망이 한껏 피어오르던 순간이었지만, 그 봄은 끝내 폭력과 죽음으로 덮여 버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요하면서도 뼈아픈 저항의 상징이 바로 김상진 열사입니다.🌱 서울의 봄 – 민주주의에 대한 찬란한 기대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며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립니다.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는 희망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시민과 학생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도래처럼 느껴졌습니다.그 직후 전국적으로 시국토론회,..
부마항쟁(1979) – 유신독재를 흔든 시민의 함성 🔥 부마항쟁(1979) – 유신독재를 흔든 시민의 함성"침묵은 무기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외친 민주주의는 결국 권력을 흔들었다."1979년 가을, 조용하던 남도의 항구 도시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부산과 마산, 이 두 도시는 곧 전국적인 정치 격변의 진원지가 됩니다.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이 불길은 결국 18년간의 유신 독재를 끝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배경 – 눌려 있던 분노의 응축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후, 한국은 명목상 민주공화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영구집권 체제였습니다.박정희 정권은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긴급조치를 통해 반대 의견을 봉쇄하였습니다.사회는 고..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 – 한국전쟁의 또 다른 전장, ‘잊힌 전쟁’ 🏔️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 – 한국전쟁의 또 다른 전장, ‘잊힌 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정전협정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그러나 전쟁이 공식적으로 멈춘 뒤에도 대한민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멎지 않았습니다.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치열했던 곳은 바로 지리산이었습니다.1948년부터 1955년까지 약 8년간,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국군과 좌익 무장세력 간의 게릴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이 전쟁은 통상 ‘빨치산 토벌전’이라 불리며, 한국전쟁과 별도로 전개된 장기 국지전이었습니다.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마을이 사라졌지만, 이 전투는 오랫동안 역사의 조명 밖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하필 지리산이었을까?지리산은 남한 최대의 산악지대로, 험준한..
보도연맹 사건(1950) – 반공의 이름으로 학살된 민간인들 🔥 보도연맹 사건(1950) – 반공의 이름으로 학살된 민간인들“이념이 생명을 삼켰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가 먼저 움직인 것은 적과의 전투가 아니라 자국민의 처형이었습니다.그들은 무장을 들지 않았고,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어느 날 서류 한 장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그리고 국가가 ‘의심’했다는 이유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습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대 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인 보도연맹 사건입니다.수십 년 동안 은폐되고, 침묵 속에 묻혔지만, 오늘 우리는 이 진실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보도연맹이란 무엇인가?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 4월, 이승만 정권 하에서 창설된 반공 계몽조직입니다.본래 목적은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
여수·순천 10·19 사건 – 총을 든 양심, 그리고 피로 얼룩진 진압 🔥 여수·순천 10·19 사건 – 총을 든 양심, 그리고 피로 얼룩진 진압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이른바 여수·순천 10·19 사건(또는 여순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이 건국 직후 겪은 가장 심각한 내란 사태 중 하나이자,당시 국가가 안고 있던 이념 갈등, 국가 정통성, 군 내부 균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건이었습니다.그 출발은 ‘양심의 거부’였고, 그 끝은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의 희생, 군대 내 숙청으로 귀결되었습니다.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폭력, 그리고 분단 현실의 참혹함이 집약된 비극, 여순사건을 다시 돌아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경: 제주 4·3 진압 명령과 국군의 고민1948년 8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