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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일본 외교 사절 파견과 외교 전략

발해의 일본 외교 사절 파견과 외교 전략

728년, 발해는 일본에 외교 사절을 공식적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건국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대외 외교 무대에서 자주성을 확보하려 한 중요한 외교적 시도였습니다.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적 긴장과 교섭에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실리적 전략이기도 하였습니다. 발해의 외교 사절 파견은 단지 국가 간 인사를 교환한 수준을 넘어선 중대한 정치 행위였으며, 해상 외교의 효시로서도 의미가 큽니다.

발해의 일본 외교 사절 파견과 외교 전략

 

파견 배경과 외교적 맥락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해 698년에 건국한 이후,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에서 지속적인 긴장을 겪었습니다. 특히 당나라와의 책봉 체제를 수용하면서도, 독립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병행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8세기 초 발해는 당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일본과의 외교 교섭을 본격화하게 됩니다. 발해는 당과의 외교에서 피동적 위치에 있기를 원치 않았고, 다각적인 외교 루트를 통해 주권 국가로서의 외교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 중이었으며,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발해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동아시아 외교 무대에서 새로운 외교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한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당나라 중심의 조공 체제가 일반적이었으나, 발해는 일본과의 독자적 교류를 통해 당의 외교 질서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출하였습니다.

"발해의 일본 외교 사절 파견은 단순한 친선 목적을 넘어, 당에 대한 외교적 견제의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사절단의 구성과 일본 측 반응

728년 파견된 발해 사절단은 정식 외교 문서와 함께, 다양한 예물을 일본 조정에 전달하였습니다. 사절단은 왕명을 지닌 공식 대사였으며, 이는 발해가 스스로를 독립된 정치 실체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발해 사절단을 국가 간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정식 파트너로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높은 예우를 갖추어 환대하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발해 사절의 방문 기록이 명시되어 있으며, 일본 측은 발해를 ‘대씨(大氏)의 나라’로 지칭하며 문화적 동질성과 존중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 속에서 발해가 단순한 변방 세력이 아니라, 당과 대등한 문명국으로 인정받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발해가 일본과 교류한 최초의 시도는 이후 수차례 이어졌고, 두 국가는 꾸준한 문화·기술·인적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속일본기에는 발해 사절을 정중히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발해가 동북아 외교의 주요 국가로 부상했음을 나타낸다."

 

외교 전략의 의미와 영향

발해의 일본 사절 파견은 단순히 우호 외교의 수단을 넘어,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다변화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당과의 외교에서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제3국과의 협력 구조를 마련함으로써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고립을 피하고, 동아시아 국제 관계 속에서 독자적 행보를 걷는 데 성공적인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발해는 이후에도 꾸준히 일본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해상 교역과 문화 교류를 적극 전개했습니다. 발해의 도자기, 서적, 불교 경전 등이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일본 문화 발전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발해는 이를 통해 ‘문화 수출국’으로서의 위상도 함께 확보하게 되었으며, 자국의 정체성과 위신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교훈

728년 일본에 파견된 발해 외교 사절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해상 외교 활동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는 고대 동아시아 외교 질서 속에서 자주성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한 외교적 모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 간의 균형 외교와 다변화 전략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상 외교에 대한 자신감을 얻고, 이후 중국, 일본, 흑수말갈 등과의 복합적 외교 관계를 전개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일본과의 첫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가 자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전략적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외교적 유연성과 실용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습니다.

"발해의 일본 외교는 고립된 외교가 아닌, 능동적이고 실용적인 대외 전략의 모범이었다."

 

연도 사건
728년 발해, 일본에 외교 사절단 공식 파견
729년 일본 조정, 발해 사절에 우호적 답신
730년대 이후 발해-일본 간 문화·문물 교류 본격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