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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흠무의 ‘해동성국’ 도약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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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흠무의 ‘해동성국’ 도약 정책

발해의 제3대 왕, 대흠무(大欽茂, 재위 737~793년)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발해를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킨 인물입니다. 그의 치세는 단순한 영토 확장에 그치지 않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계적인 행정 구조를 확립하는 등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 그 찬란한 전성기의 시작은 바로 대흠무의 치세였습니다. 오늘날 대흠무의 업적은 발해가 동북아시아의 당당한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기반이 된 도약의 역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흠무의 ‘해동성국’ 도약 정책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체제 구축

대흠무는 즉위 직후부터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종래의 귀족 중심 통치 구조에서 벗어나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관료제를 정비함으로써 통치 효율을 극대화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3성 6부제의 행정 체계를 명확히 확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선진 제도를 융합한 독자적인 구조였습니다. 이 체계는 중앙에서 지방까지 국가 운영의 일관성과 통제를 가능하게 했고, 왕권 강화와 행정력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대흠무는 지방관의 임명권을 왕실이 독점하도록 제도화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세력 성장을 견제하고, 전국을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발해가 안정적인 중앙집권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흠무는 발해의 고유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외부 제도를 절충하여, 독자적인 정치 문화를 완성해 나갔다.”

 

광활한 영토 확장과 군사력 강화

대흠무의 치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업적은 바로 영토 확장입니다. 그는 북쪽으로는 흑룡강 유역까지, 남쪽으로는 대동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발해를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강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 해양 교역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요동 지역과 간도 일대에서 주도적인 군사 작전을 펼쳐 말갈계 부족들을 통합하거나 복속시켰습니다. 이로써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사는 다민족 제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발해는 이 시기에 5경 15부 62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토 행정 체계를 완성해 가며,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해동성국이라 불린 발해의 국력은 대흠무의 대대적인 정복 사업과 군사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능동적 대외 외교와 국제적 위상

대흠무는 외교 분야에서도 능동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당나라와 사신 교환을 통해 외교적 안정과 문물 교류를 꾀했고, 일본과의 해상 교류도 지속하며 발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당과의 외교에서는 조공과 책봉을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주적 국가로서의 입장을 잃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은 단순한 문물 교류를 넘어,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를 선보이며 발해의 정치·문화적 자긍심을 드러냈습니다.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발해를 ‘대국(大國)’이라 칭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이 발해를 당당한 문명국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대흠무는 신라와의 관계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발해와 신라는 국경을 맞댄 이웃으로서 때로는 긴장했지만, 문화 교류와 상호 견제를 병행하는 복합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칭의 탄생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된 배경은 당나라 측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기록된 문구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대흠무 시기 발해가 보여준 정치적 안정, 군사적 강성, 그리고 문화적 융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표현이었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고구려의 전통 문화가 어우러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수도인 상경성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본뜬 구조로 계획되었으며, 이는 발해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음을 상징합니다. 상경성 유적은 발해가 단순한 군사 강국을 넘어, 체계적인 도시 계획과 발달된 문화를 가진 고등 문명 국가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해동성국 발해는 단순한 강국을 넘어, 문화와 정치가 융합된 고등 문명 국가의 모습이었다.”

 

대흠무의 통치 시기 주요 사건

연도 사건 의의
737년 대흠무 즉위 발해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하며 중앙집권 개혁을 시작하다.
740년대 영토 확장 및 요동 진출 흑룡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말갈족을 복속시키다.
750년대 당·일본과 외교 관계 강화 능동적인 외교 정책으로 발해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다.
8세기 중반 해동성국(海東盛國) 당나라로부터 '바다 동쪽에 융성한 국가'라는 뜻의 칭호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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