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19) 썸네일형 리스트형 홍경래의 난 –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 ⚔ “변방의 분노가 조선을 흔들다”홍경래의 난 –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역사는 언제나 중심의 이야기로 기록되기 쉽습니다. 조선사 역시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사, 왕권의 변화, 개혁과 개악의 흐름이 주로 조명됩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진짜 열기는 변방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1811년, 조선 북서부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그러한 ‘변방의 분노’가 폭발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전국적인 역사 교과서에서는 비교적 작게 다뤄지지만, 이 반란은 조선 후기 사회 구조의 모순을 폭로한 거대한 균열이었습니다.📍배경 – 서북인의 차별과 세도 정치의 폐단조선은 전통적으로 지역에 따른 신분과 인식의 차별이 존재하던 사회였습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은 외세 침입이 잦고, 이민족과 가까운 국경이라는..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 📍 조선과 청, 국경을 긋다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대한민국의 동북쪽 경계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민감한 외교 사안입니다. 독도 문제, 간도 영유권, 두만강 경계선 논의 등은 모두 ‘국경’이라는 개념과 직결되죠.이런 현대적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입니다.표면적으로는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였지만, 그 결정의 기준과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란을 남기고 있습니다.🗺 배경: ‘압록강 너머, 저 산은 누구 땅인가?’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백두산 일대의 경계가 모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간도 지역(..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 예(禮)를 둘러싼 조선 정국의 분열 📍 조선 왕실의 상복에서 터진 정치 대립기해예송과 갑인예송 – 예(禮)를 둘러싼 조선 정국의 분열조선 후기, 유교적 예법은 단지 의례적 의미를 넘어서 정치의 중심축이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장례나 제례에서 ‘예(禮)’는 곧 정치적 입장과 권력의 정당성을 상징하기도 했죠.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입니다.표면적으로는 왕실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정치 대립, 왕권과 신권의 충돌, 나아가 사림 정치의 심화된 분열이 숨어 있습니다.⚖ 예송(禮訟)이란 무엇인가?‘예송’은 문자 그대로 예(禮, 유교적 예법)에 관한 논쟁을 의미합니다. 주로 국왕이나 왕실 인물의 장례에 따른 복상 기간(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 – 외교와 통상을 동시에 엮은 실용적 선택 📍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공식 무역 조약계해약조(癸亥約條, 1443) – 외교와 통상을 동시에 엮은 실용적 선택우리는 흔히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왜구(倭寇)와의 갈등 중심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충돌만이 아닌, 실용적 외교와 통상 협정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계해약조(癸亥約條)입니다.이 조약은 조선과 일본 간의 첫 공식 무역 협정이자, 이후 조선의 왜관 설치와 대일 외교 체계의 기틀이 되었던 중대한 사건입니다. 그 배경과 결과, 그리고 오늘날의 시사점까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배경: 계속된 왜구의 침략, 그 끝없는 골칫거리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까지, 조선은 일본에서 오는 해적, 즉 왜구의 약탈로 끊임없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문소의 부패 – 조선 왕권강화의 이면 이문소의 부패 – 조선 왕권강화의 이면조선은 고려의 몰락을 거울삼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새로운 왕조는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세우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권력 집중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부패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문소(吏文所)입니다. 이문소란 무엇인가?이문소는 본래 고려 말 공민왕 대의 이문방(吏文房)을 모태로 한 실무 행정 기구였습니다. 문서를 정리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등 단순한 업무 중심의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이후, 이 조직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점차 변모하게 됩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이 왕권 강화를 위해 비공식적인 감시체계를 도입하면서, 이문소는 단순 실무 조직을 넘.. 삼별초 항쟁 – 끝나지 않은 저항의 기록 삼별초 항쟁 – 끝나지 않은 저항의 기록고려 시대, 몽골과의 전쟁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무장 항쟁을 벌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삼별초(三別抄)입니다. 삼별초는 단순한 군사 집단이 아니라, 자주성과 독립의 상징으로, 고려사의 굴곡진 한 페이지를 장식한 존재였습니다. 삼별초란 누구인가?삼별초는 본래 최씨 무신정권 시기 설치된 사병 조직으로, 야별초에서 파생된 군사 기구입니다. 정규 군대와는 별도로 운영되며, 수도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 국경 방어 등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골과의 강화에 나서고 개경 환도(1270년)를 결정하면서, 삼별초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됩니다.그들은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진도로 이동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려 정부와는 별도로 대몽 항전을.. 쌍성총관부 설치 – 우리가 몰랐던 북방의 상실 쌍성총관부 설치 – 우리가 몰랐던 북방의 상실고려와 몽골(원) 간의 오랜 전쟁은 교과서 속에서 간단히 ‘원 간섭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지만, 그 이면에는 자주성과 주권 상실의 현실이 서려 있습니다. 특히 1258년, 몽골이 고려 북부 함경도 지역에 설치한 쌍성총관부는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닌, 고려 내부의 균열과 국토 일부를 잃은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이 사건은 단순히 영토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고려가 지켜내야 했던 국가 정체성과 자존심, 그리고 자주 외교의 기반까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쌍성총관부의 설치는 고려가 외교적 주도권을 상실하고, 외세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상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배경: 고려와 몽골의 충돌과 피로13세기 초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를 휩쓸며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하였습니.. 이전 1 ··· 12 13 14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