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마항쟁(1979) – 유신독재를 흔든 시민의 함성
"침묵은 무기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외친 민주주의는 결국 권력을 흔들었다."
1979년 가을, 조용하던 남도의 항구 도시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부산과 마산, 이 두 도시는 곧 전국적인 정치 격변의 진원지가 됩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이 불길은 결국 18년간의 유신 독재를 끝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부마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 배경 – 눌려 있던 분노의 응축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후, 한국은 명목상 민주공화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영구집권 체제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긴급조치를 통해 반대 의견을 봉쇄하였습니다.
사회는 고도성장의 외형 아래 양극화와 억압으로 균열이 깊어졌고,
노동자, 학생, 지식인, 종교계 모두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과 마산은 중공업과 항만 산업의 중심지로,
노동자 계층과 대학생 인구가 많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부산 지역 대학생들은 유신 반대를 준비하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항쟁의 시작 – 10월 16일, 부산이 먼저 불붙다
1979년 10월 13일, 부산의 부산대학교 학생 30여 명이 유신 반대 시위를 계획합니다.
10월 16일 정오, 교내 집회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시위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으로 번졌고,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내로 진출하였습니다.
- 경찰서, 시청, 신문사 등 정부 기관이 파괴되었고,
- 정부는 이를 단순한 소요가 아닌 ‘폭동’으로 규정합니다.
군 병력이 동원되어 진압에 나섰고, 부산은 사실상 계엄 상태에 돌입합니다.
📢 마산의 동참 – 10월 18일, 항쟁의 확산
부산 사태는 곧 마산에도 전해졌고,
10월 18일 경남대 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시작합니다.
이날 오후, 마산의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합세하였고,
약 1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합니다.
- 마산경찰서가 습격당하고 방화되었으며,
- 시민들은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결국 정부는 부산과 마산 모두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대를 투입합니다.
체포된 사람은 부산 1,000여 명, 마산 400여 명 이상으로 기록되며,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 항쟁의 여파 – 박정희 정권의 붕괴
부마항쟁은 단순한 지방 소요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 존재하던 균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도화선이 됩니다.
- 박정희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논의했고,
-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10.26 사건, 즉 정권 핵심부의 붕괴는 부마항쟁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 부마항쟁의 특징과 의의
- 학생과 시민이 연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유신 운동
- 4.19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지역 주도 항쟁
- 노동자, 자영업자, 종교계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
- 자발성과 지역성
- 중앙의 지도 없이도 지역에서 스스로 조직되고 확산됨
- ‘남도에서 먼저 터진 항쟁’이라는 상징성
- 정권 붕괴의 촉매제
- 유신체제의 모순을 표면화
- 박정희 암살 및 이후 정치개혁의 흐름 촉진
🕯 그 후 – 기억과 재조명
한동안 부마항쟁은 공식 역사에서 소외된 사건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며 언급조차 꺼렸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진상규명과 재평가가 진행되며 역사적 위상이 회복되었습니다.
- 1999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부마민주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추진 중
✍ 마무리하며 – “불꽃은 사라져도 불씨는 남는다”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흔든 실질적인 민주 항쟁이었습니다.
그날의 외침은 광주로, 6월 항쟁으로, 촛불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이름 없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거리의 함성,
억압을 뚫고 흘린 땀과 피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는 기록될 뿐만 아니라, 기억되고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 날의 함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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