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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석탑의 비문 왜곡 논란 – 백제 멸망 이후, 진실은 누가 썼는가?

Soonduck 2025. 8. 5. 21:13

정림사지 5층석탑의 비문 왜곡 논란 – 백제 멸망 이후, 진실은 누가 썼는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사비(오늘날 부여)에는 지금도 눈에 띄는 석조 건축물이 우뚝 서 있습니다. 바로 정림사지 5층석탑입니다. 고려 시대 이전 석탑 중 유일하게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백제의 정제된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입니다.

하지만 이 석탑에는 단순한 건축 미학을 넘어선 복잡한 역사적 논란이 숨겨져 있습니다. 석탑의 1층 몸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이 과연 역사적 사실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 오랜 시간 학계와 시민들 사이에서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림사지 5층석탑 비문의 내용과 왜곡 논란의 핵심, 그 정치적 의도와 현대적 해석을 집중 조명합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비문 왜곡 논란 – 백제 멸망 이후, 진실은 누가 썼는가

🧱 정림사지 5층석탑 – 백제의 미와 상징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 후기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정림사’의 중심 탑으로, 정제된 비례감과 우아한 구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석탑은 목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석조 건축물로, 5층의 균형 잡힌 형태는 백제의 기술력과 미의식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문화재로서의 가치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 석탑의 1층 탑신에 새겨진 비문 때문입니다. 이 비문은 단순한 종교적 경문이 아니라, 백제의 멸망을 선언하고 당나라의 승리를 과시하는 일종의 ‘기념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비문의 내용 – 백제 멸망의 기록인가, 당의 선전인가?

비문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정식 명칭은 〈대당평백제국비〉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당(大唐)은 정의의 군대를 일으켜 백제를 쳤으며, 장수 소정방이 군을 이끌고 침공해 백제를 멸망시켰고, 왕을 사로잡아 당으로 보냈으며,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전쟁 승리 기념문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 📌 백제의 멸망 원인을 내분이 아닌 외침으로 단정
  • 📌 신라의 참여는 전혀 언급되지 않음
  • 📌 당의 백제 지배를 합리화하는 용어 사용

이러한 구성은 당나라의 정복 정당성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신라와 백제 사이의 복잡한 관계나 전쟁의 실제 양상은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 왜곡 논란 – 사실을 지우고 서사를 새로 쓴 비문

이 비문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역사 왜곡의 가능성입니다. 당시 백제 멸망(660년)은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공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라는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규모 군사를 파견했고, 당나라군은 해군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비문에는 신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제로 여겨집니다. 당시 당나라는 한반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하고 있었고, 신라가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제를 멸망시킨 주체를 ‘당나라 단독’으로 강조함으로써, 향후 한반도 남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소정방은 이 비문을 통해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고 미화함으로써, 황제에 대한 정치적 보고서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 정치적 선전물로서의 비문

정림사지 5층석탑 비문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패자 백제를 굴복시키고, 신라를 배제하며, 당의 승리만을 기념하는 정치적 선언문입니다. 마치 근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점령한 뒤 세우는 ‘기념탑’과 같은 성격입니다.

  • 📌 정복 전쟁의 주체 왜곡
  • 📌 공동 승리의 사실 삭제
  • 📌 정복자의 시각에 기초한 일방적 서술

그런 점에서 이 비문은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제한적일 수 있으며, 오히려 당시의 지배 담론과 선전 방식, 권력 언어를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현대적 해석 – 비문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비문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은 분분합니다. 일부는 “전쟁 후 점령군이 남긴 기록으로서 사실 왜곡은 당연한 것”이라며 당시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일부는 “공동 승리를 단독 승리로 포장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조작”이라며 비문 철거나 대체문 설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이를 ‘비문 자체는 남기되, 그 내용의 역사적 왜곡에 대한 설명을 함께 전시’하는 방식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즉, 비문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안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마무리하며 -돌에 새겨진 글보다 중요한 것

정림사지 5층석탑 비문은 지금도 부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새겨진 글보다, 그 글이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이 아닙니다. 패자의 목소리, 누락된 진실, 의도된 침묵을 읽어내는 것이 진정한 역사 해석의 시작입니다.

이 비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누가 이 글을 썼는가? 무엇을 위해 남겼는가? 그리고 무엇을 감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