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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

Soonduck 2025. 7. 2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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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청, 국경을 긋다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

대한민국의 동북쪽 경계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민감한 외교 사안입니다. 독도 문제, 간도 영유권, 두만강 경계선 논의 등은 모두 ‘국경’이라는 개념과 직결되죠.
이런 현대적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였지만, 그 결정의 기준과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논란을 남기고 있습니다.

백두산정계비 건립(1712) – ‘경계’는 정말 분명했을까?

🗺 배경: ‘압록강 너머, 저 산은 누구 땅인가?’

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백두산 일대의 경계가 모호했습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간도 지역(오늘날의 연변, 길림성 일대)이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에 대해 갈등이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만주 지역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민감했고, 조선은 이 지역에서의 조선인 이주, 산림 채취, 거주 민원 등으로 인해 갈등이 지속됐습니다.

청나라는 국경 침범이라고 항의했고, 조선은 그 땅이 전통적으로 조선 민의 삶터였다고 맞섰습니다. 이런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양국은 ‘경계 조사단’을 꾸려 백두산 일대를 실사하게 됩니다.

🧭 백두산정계비 건립의 과정

1712년(숙종 38년), 조선의 대표로 박권(朴權), 청나라의 대표로 목극등(穆克登)이 경계 조사를 위해 백두산 일대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 큰 난관에 봉착합니다. 바로 백두산의 지리적 특성 때문입니다.

  • 백두산은 고산 지대이며, 기후도 험하고 정확한 발원지를 특정하기가 매우 어려움
  • 당시 지도 제작 기술과 측량 장비의 한계도 컸음
  • 현지 주민들의 증언도 서로 달라 경계를 특정하기 어려운 상황

이런 상황에서 목극등과 박권은 한 가지 타협을 선택합니다. 바로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두 줄기 물줄기’를 기준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 정계비(境界碑)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 정계비의 내용과 논란의 씨앗

1712년 6월, 양국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 높이 약 1.5m의 화강암 비석을 세웁니다. 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습니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으로 경계를 삼는다.”

여기서 바로 논란이 생깁니다.

  • ‘토문강(土門江)’이 과연 지금의 두만강인가?
  • 아니면 현재 중국 길림성에 있는 다른 지류인가?

조선은 당시 토문강 = 두만강이라 간주했고, 따라서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도 조선 땅이라 해석했습니다.
반면 청나라는 후에 토문강을 ‘혼강’(渾江)의 지류로 해석하며, 간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켜버립니다.

📉 국경 명시인가, 애매한 타협인가?

백두산정계비는 엄연히 양국이 공동으로 세운 공식 비석이지만, 실제 문구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었습니다.

  • 명확한 좌표나 지도 없이 ‘물줄기 이름’만으로 경계를 삼음
  • 이후 두 나라는 같은 문구를 서로 다르게 해석
  • 특히 19세기 후반 청나라가 간도를 실질적으로 점령하면서 갈등 격화

조선 말기 고종 정부는 간도 문제에 대해 항의했지만, 이미 국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실효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 현대적 연관성 – 간도 문제와 독도 논쟁

백두산정계비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18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간도 영유권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 간도(연변 일대)는 조선 민족이 오랫동안 살아온 땅이었으며,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에 따라 영유권 논의의 근거가 달라짐
  • 일제강점기, 일본은 청나라와 협상 끝에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함(1909년 간도협약)
  • 하지만 이는 조선의 동의 없이 진행된 협정으로, 국제법상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음

또한 이 경계 개념은 독도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경계를 애매하게 정하면 훗날 어떤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 마무리하며 – 경계란 무엇인가?

1712년, 박권과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을 명확히 하려는 양국의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호한 기준, 불완전한 기술, 정치적 타협은 오히려 훗날 갈등의 불씨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에서 경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명확하게 정립되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당시 조선의 외교력, 정보력의 한계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국경과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백두산정계비의 사례는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국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에 깊은 울림을 주는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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