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아래에 숨겨진 전술, 고구려의 지하 요새망 운용
땅 아래에 숨겨진 전술, 고구려의 지하 요새망 운용
612년,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수나라 문제(文帝)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대대적인 동방 정벌을 계획하였고, 그 중심에는 고구려 정복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외침에 대비하여 군사적 방어체계를 강화했으며, 그중에서도 지하 요새망이라는 특수한 전략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고대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살수대첩 당시 고구려가 단순한 야전 전투뿐 아니라, 지하 통로와 산성 연결망을 어떻게 운용했는지를 중심으로 당시의 전술 체계와 전략을 살펴보겠습니다.
⚔ 수나라의 침공과 고구려의 대응
612년, 수 양제는 약 11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른바 ‘을사년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침공 중 하나였습니다. 수나라군은 육로와 해로로 나뉘어 진격하였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대응하여 야전 전술과 방어 전술을 병행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특히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을 소모시킨 뒤 살수(청천강)에서 전멸시키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지형에 대한 이해와, 특수한 요새 운용 방식이 있었습니다.
🏯 산성과 연결된 지하 통로 – 고구려식 방어 체계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험준한 산악 지대를 방어에 활용하였습니다. 주요 도시와 산성은 높은 언덕이나 산에 지어졌고, 각 산성끼리 지하 통로 혹은 암도(暗道)로 연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평상시에는 탈출로로, 전시에는 보급 및 병력 이동 경로로 활용되었습니다.
《삼국사기》와 《수서》, 《자치통감》 등의 문헌에는 직접적인 ‘지하 요새’ 표현은 등장하지 않지만, “산속 깊은 곳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성을 포위했으나 내부로부터 보급이 끊기지 않았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고구려가 땅 밑을 통한 연결망을 전략적으로 활용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시설은 단순한 땅굴이 아니라, 산성 내부의 우물, 창고, 군사 회랑 등과 연결된 복합적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암벽을 파내 만든 인공 동굴 구조였습니다.
🛡 살수대첩의 성공 뒤에는 '보이지 않는 전선'이 있었다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대첩의 성공은 단순히 병력 배치나 기동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의 매복과 유인전술에 당하며 고립되었고, 식량과 물자가 바닥났습니다.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며 살수에서 결정타를 날렸지만, 그 전에 고구려는 내부 요새에서 지속적으로 병력과 물자를 분산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지하 요새망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각 산성과 도시를 중심으로 비상시 병력 수용 공간을 마련해두었으며, 평상시 민가와 구분되는 지하 저장고 및 비상 회랑이 운용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도 다수 확인됩니다. 예를 들어, 안학궁 유적지 인근에서는 지하 암실 구조가 발견되었고, 이는 단순한 창고가 아닌 군사 시설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 지하 요새망의 전통 – 고구려만의 독창적 전술
고구려의 지하 요새망은 단지 방어용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기습, 은밀한 이동을 위한 전략적 도구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적이 산성을 포위하더라도, 고구려군은 내부에서 지하를 통해 빠져나가 후방을 기습하거나 보급품을 운반하는 등 능동적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술은 고구려가 단순히 힘으로 싸우는 국가가 아니라, 전략과 지형 활용에 뛰어난 고도화된 전쟁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후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산성 중심 방어 체계와 비상 통로 구조는 유산처럼 계승되었으며, 근현대 독립군 역시 이러한 구조를 참고해 활동하였습니다.
✍ 마무리하며 – 땅속에 숨은 전략,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
살수대첩은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구려의 치밀한 지하 요새 체계와 그것을 이용한 복합 전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단지 병력과 무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준비와 공간 활용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 전쟁사에 있어 독보적인 전략 국가였으며, 지하 요새망이라는 숨겨진 무기는 단순한 방어가 아닌, 능동적인 공격과 방어의 결합체였습니다.
우리가 살수대첩의 승리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승리를 가능하게 한 시스템과 구조에 대한 이해 역시 역사적 통찰로 남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