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의 진국 독립 선언과 당과의 마찰
대조영의 진국 독립 선언과 당과의 마찰
고왕(高王) 대조영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 및 말갈 세력을 이끌고 동모산 부근에 이르러 698년에 진국(震國)을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국호 변경이 아니라,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 국가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의 선언입니다.
그는 영주(營州)에서 당의 지배 아래 있었던 고구려 유민·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이동하였고,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당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이 승리를 기반으로 대조영은 “진국왕”이라는 칭호를 자처하며 국호를 정하였습니다.
진국 건국과 독립의 선언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수도를 정하고 진국을 세웠습니다. 이는 고구려 계승의 정통성과 독자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곧 당나라와의 마찰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은 초기에는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이해고를 보내 군사적 제압을 시도하였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의 자주 독립 움직임을 경계하였고, 대조영의 군세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자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 고구려 유민 지도자들이 당의 벼슬을 거절한 것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거절이었으며, 이는 당 조정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걸걸중상·걸사비우에게 당은 봉작을 내려 회유를 시도했지만, 이들은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당은 이해고를 보내 진압하려 하였다.”
천문령 전투와 마찰의 심화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을 결집해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을 격파하였습니다. 기록에는 '이해고만 탈출'했다 할 정도로 당군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진국의 자주성을 확립하면서, 당과의 관계를 군사적 대립으로까지 밀어붙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조영의 군대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한 전략으로 당의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천문령 일대의 험준한 지형은 고구려식 전투 방식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단순한 승리를 넘어 고구려 전통 전술의 계승이라는 평가도 받습니다. 전투 이후 대조영은 진국이라는 국호로 자립국가임을 재차 강조하며, 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욱 명확히 하였습니다.
당과의 외교적 대응 – 국호 변화와 책봉
건국 초기 국호는 '진국'이었으나, 713년에 당나라가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책봉을 내리며 국호를 ‘발해’로 외교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타협이자 외교적 수용이었지만, 동시에 진국의 독립적 성취를 당이 인정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이후 발해는 당과 문화·정치적 교류를 이어갔고, 점차 왕국으로서 자리매김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고구려 계승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 유연하게 적응한 사례로 남습니다. 발해의 왕들은 대조영의 기틀을 기반으로 국내 정비와 국제 외교를 병행하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발해는 초기 독립 선언의 진국에서 출발했으나, 당의 책봉을 통해 외교적 안정성과 정통성을 확보한 국가로 변모하였다.”
역사적 의미와 오늘날에 주는 교훈
대조영의 진국 독립 선언은 단순히 고구려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적 위치에서 존재하던 인물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역경 극복의 이야기로, 현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천문령 전투와 외교적 책봉의 과정은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군사력과 외교력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발해는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후, 외교적으로 당의 인정을 받아낸 균형 잡힌 국가 경영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유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점에서 발해는 단순한 계승 국가를 넘어선 역사적 의의를 가집니다.
“천문령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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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년 | 영주 탈출, 말갈·고구려 유민 규합 |
698년 | 동모산에 진국 건국, 진국왕 자처 |
698년 |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 격파 |
713년 |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 책봉, 국호 '발해' 사용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