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저항, 삼별초의 대몽항쟁(1270~1273)
⚔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고려의 마지막 저항, 삼별초의 대몽항쟁(1270~1273)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패자의 이야기에서 더 큰 울림을 느낍니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고려가 몽골(원)과의 강화 협정을 맺고 항복한 이후,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던 무장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삼별초(三別抄).
지금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이 보여준 저항은 우리 역사에서 자주성과 독립 의지의 상징으로 남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 삼별초란 무엇인가?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 권력을 장악한 최우가 조직한 특수 군대입니다. 본래는 궁궐을 지키고,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며, 반란이나 외적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 포로 출신으로 구성된 신의군을 통합하여 ‘삼별초’라 불렀고
▶ 시간이 지나면서 최씨 정권의 실질적 무력 기반으로 성장하며, 고려 후기에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1270년, 고려 조정은 더 이상 몽골과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강화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에 따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몽골과의 관계를 수용하며 ‘원 간섭기’로 접어들게 되죠.
이때, 삼별초는 조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왕이 항복해도, 우리는 싸운다”는 결의를 다지며 무장 봉기를 일으킵니다.
⚔ 대몽항쟁의 시작 –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1270년,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왕실을 대신할 지도자로 "승화후 왕온(王溫)"을 옹립하여 독자 정권을 선포합니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자주적인 국가의 재건을 목표로 한 행위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본거지를 남쪽 진도로 옮기고, 이곳에서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며 격렬한 전투를 벌입니다.
▶ 1271년에는 전열을 정비해 다시 제주도로 이동,
▶ 1273년까지 3년간 지속적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 항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패권에 맞선 독립운동의 원형이자, 가장 극단적인 ‘무장 자주 저항’이었습니다. 고려 전체가 무릎 꿇은 상황에서 오직 삼별초만이 끝까지 버틴 것이죠.
📍 삼별초 항쟁이 남긴 역사적 의미
- 자주성과 민족정신의 표상
당시 고려 왕실조차 원나라에 굴복했던 상황에서, 삼별초는 독립과 자존을 외친 유일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싸운 정신은 이후에도 ‘충절’과 ‘의기’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회자됩니다. - 제주도와의 인연
삼별초가 마지막 저항의 거점으로 선택한 제주도는, 이 사건 이후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가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제주도의 역사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죠. - 후대에 전해진 정신적 유산
비록 실패한 항쟁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삼별초는 충절의 상징으로 민간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삼별초 유적지는 항몽 정신과 독립 의지를 기리는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삼별초의 항쟁은 이미 끝났다고 여겨진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무릎 꿇지 않았으며, 절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주’와 ‘독립’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값진 희생 위에 존재하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삼별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모두가 물러날 때, 당신은 나아갈 수 있는가?”
“권력과 현실 앞에서 신념을 지킬 수 있는가?”
그 질문의 답을 고민하게 만드는 역사.
그것이 바로 삼별초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