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리왕의 수도 이전과 왕족 내 갈등 (졸본 → 국내성)
📍 고구려 유리왕의 수도 이전과 왕족 내 갈등 (졸본 → 국내성)
역사는 종종 찬란한 업적 뒤에 가려진 갈등과 분열의 그림자를 잊곤 합니다.
고구려 건국 초기, 2대 왕인 유리왕(瑠璃王)은 위태로운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도를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는 대규모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명분상 더 넓은 평야, 방어에 유리한 지형, 농업 기반 확장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상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왕권과 혈통, 충성, 정통성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수도 이전 결정 속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주몽의 아들들과 유리왕 간의 갈등은 단순한 형제 싸움이 아니었으며, 고구려 초창기 왕위 계승과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였습니다.

🏔 졸본 – 고구려의 시작이자 주몽의 기억
기원전 37년, 동부여에서 탈출한 주몽(朱蒙)은 오이·마리·협보 등과 함께 졸본 지역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졸본은 산세가 험하고 천연의 요새로 방어에 유리했으며, 초기 부족연맹체의 기반으로 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졸본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리적 폐쇄성, 협소한 경작지, 국력 확장에 불리한 구조가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리왕은 통치 초기에 국내성(현재의 집안 지역)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습니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끼고 있어 수운과 교통이 발달하였고, 중앙 집권 체제 수립에 유리한 구조를 갖춘 지역이었습니다.
👑 유리왕 – ‘주몽의 아들’인가, ‘정통의 후계자’인가
유리왕은 고구려 2대 왕이지만 그의 출신과 정통성은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는 주몽의 친아들이지만 졸본에 함께하지 않았으며, 후에 주몽이 태양신 해모수와의 신화적 존재로 격상된 이후, ‘왕위 계승자’로 뒤늦게 등장하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몽의 아내 예씨 부인과 함께 자식을 낳은 유리는 동부여에 남겨졌다가 나중에 자신이 주몽의 아들임을 밝히며 고구려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초기 정국의 핵심 인물들(특히 주몽과 함께한 오이, 마리 등의 세력)은 유리의 정통성에 일정한 거부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유리왕이 왕이 된 뒤 졸본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로 나아간 것은 단순히 행정의 중심지를 옮긴 것이 아니라, 초기 건국세력과의 단절, 그리고 새 체제 수립의 신호탄이었습니다.
⚔️ 주몽의 아들들과의 갈등 – 천도에 숨겨진 분열
고구려 시조 주몽에게는 유리 외에도 비류, 온조, 남해 등 다양한 설화적 또는 실존 가능성이 있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비류와 온조는 후에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이는 유리와의 불화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가 고구려에 입성했을 때 주몽은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고, 이에 기존의 왕자들(비류, 온조 등)은 낙담하여 남쪽으로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단순한 묘사 이면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졸본은 주몽의 왕후 예씨와 다른 아들들이 기반을 두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유리왕의 천도는 고의적인 세력 제거 혹은 견제의 성격이 짙었으며, 왕족 일부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탈출하거나 고구려 체제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왕족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 천도 이후 – 새로운 질서, 새로운 고구려
국내성으로의 천도 이후, 고구려는 정치적 체제의 중앙집권화, 군사 조직의 정비, 귀족 등용 체계 확립 등 보다 구조적인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3대)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켰고, 고구려의 국가 체제는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왕권 강화’라는 긍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형제 간의 분열, 왕족 이탈, 기존 건국 세력과의 결별은 고구려 초창기 내적 균열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 역사적 의미 – ‘천도’는 곧 ‘혁명’이었습니다
유리왕의 졸본 → 국내성 천도는 단지 ‘수도의 이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몽 이후 고구려 내부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권력 재편성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정통성 문제, 귀족 세력 갈등, 후계 구도 정립이라는 삼중의 과제가 얽힌 복합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유리왕이 내세운 ‘천도 명분’은 정치적 혁신의 포장일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주몽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초점을 맞춘 지도자였습니다.
그 결과 일부 왕족이 분열되었고, 후일 백제가 고구려와 전혀 다른 노선을 걷게 된 근본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 마무리하며 – 기억되지 않은 갈등의 기록
오늘날 유리왕은 종종 대무신왕의 아버지, 혹은 불교 수용 이전 고구려 왕권의 기초를 다진 인물 정도로 간단히 설명됩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 특히 수도 이전이라는 선택에는 왕권 강화, 정통성 재편, 내부 숙청, 왕족 분열이라는 굵직한 갈등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천도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닌, 한 왕조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유리왕의 졸본 이탈과 국내성 천도는 고구려 초창기 가장 큰 ‘내부 혁명’이자, 분열의 씨앗이었습니다.